며칠 전, 연극 <욘>을 봤습니다. 노르웨이 작가 헨리크 입센이 일흔에 가까워지던 시기에 쓴 희곡입니다. 광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수성가했으나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8년간 복역하고 출소 후 8년간 칩거한 남성,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이남희)이 주인공입니다. 급변한 환경은 개인의 감정에 많은 영향을 주죠. 자존심이 무너질대로 무너진 욘은 '단절'을 선택하고, 그의 아내 귀닐(이주영)은 자신의 위신을 회복해 줄 아들 엘하르트(이승우)에게 집착합니다. 욘의 복역 기간에 조카를 돌봤던 이모 엘라(정아미)는 지나간 사랑을 되찾으려 합니다. 고집이 센 욘은 권위적이고 때때로 무례하지만, 동시에 웃기고 종종 안쓰럽습니다. 마치 나이 든 아버지를 보는 듯합니다. 예전이라면 마냥 싫었을 텐데, 이제는 그 마음의 빈터를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저는 남성캐릭터에 주로 이입해왔습니다. 특히 마음과는 다르게 표현에 서툴고 자유보다는 책임에 비중을 두는 남성캐릭터들이 저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해서였어요. 여성캐릭터는 주로 로맨틱한 사랑에서 파생된 감정이 대부분이라 쉽게 공감하지 못했던 것도 같아요. 이러한 반응이 사실은 개인적인 성향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였음을 알게 된 건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였습니다. 남성만큼 여성을 입체적으로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닿는 면이 적었던 거였어요. '섬세하다'는 칭찬에 가까운 단어는 종종 압도적인 힘을 가릴 수도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요. 세계여성의날을 기념하며 <더뮤지컬>에 '미투 운동 이후의 뮤지컬 여성서사' 원고를 썼는데요. 지난 6년을 되돌아보니 그동안 여성이 얼마나 소외되었는지를 알겠더군요. 없었기에 비교조차 어려웠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남성캐릭터를 여성배우가 연기하자, 여성은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렀음을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어요.
과거였다면 고집불통 아저씨의 여러 면이 저와 같다고 느끼며 공연을 봤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귀닐을 더 보게 되더라고요. 여성의 교육도 노동도 허락되지 않던 시대에 기댈 곳이 아들뿐이었던, 가부장제의 피해자. 시대적 배경을 인지하려 애썼지만, 그럼에도 욘에 비해 입체성이 상당히 제거된 여성을 2024년에 보는 건 다른 이야기였어요. (이주영 배우를 좋아해서 더 아쉬웠던 것도 같네요.) 가부장제 안에서 손발이 다 묶여버린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려 했던 걸까요? 그런 면이 존재하겠지만, 관객이 귀닐의 서브텍스트를 적극적으로 보려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어쩐지 씁쓸하게 다가왔어요. 물론 <욘>은 고독을 이야기하는 작품이고 그 중심이 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 본연'의 고독이라면 여성에게도 다양한 갈래의 고독이 있지 않을까요? 이런 고민을 하느라 공연에도 푹 빠지지 못했던 것 같아요. 공연이 끝나고 고민은 여러 갈래로 더 길게 이어지고만 있습니다. 어쩌면 오롯이 '고독'을 마주하기엔 아직 제가 젊은 걸까요?
어느새 4월입니다. '벚꽃이 아직도 안 폈어?'라고 얘기하곤 했는데요. '벌써 폈어?'라고 놀라던 작년을 생각해보면, 인간은 참 알 수 없다 싶습니다. 그게 지긋지긋하면서도 하루하루를 버티는 힘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종종 하늘을 올려보는 4월 되시길.
2주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