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자주 하시나요? 저는 약간의 전화공포증이 있습니다. 아마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외부 자극에 긴장도가 높은 성향 때문일 겁니다. 용건이 있을 때는 그것을 조리있게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용건이 없을 때는 통화의 목표가 납득되지 않아 어렵구요. 이러나저러나 불편하다는 건데, 그래도 사회생활을 하며 용건 있는 전화는 나름의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용건 없이 안부를 묻거나 고민을 털어놓는 전화는 적응이 안 되네요. (전화가 아니어도 연락할 방법이 많아져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며칠 전 산초와 오전 산책을 하던 중 중년여성의 전화 통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어요. "그렇게 보고 싶었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마도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라는 말의 대답이었겠죠. 얼굴 전체에 잔잔하게 퍼지는 미소를 보며 저런 표정을 만드는 게 '다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오전 11시의 햇살까지 더해져 아주 평화로운 한때로 기억하고 있어요.
다정, 사랑, 믿음 같은 단어를 참 많이 쓰는데, 저는 가끔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사전을 찾아보면 두루뭉술한 정의에 점점 더 고개가 갸웃해지는 거예요.
다정: 정이 많음 → 정: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 → 사랑: 어떤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 아끼다: 물건이나 사람을 소중히 여겨 보살피거나 위하는 마음을 가지다 → 마음: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감정이나 의지, 생각 따위를 느끼거나 일으키는 작용이나 태도
이어지는 단어들의 정의를 따라가다 생각했어요. 느낌의 영역을 정보나 지식의 차원으로만 대하기 때문에 모른다는 것을, 잠깐 스쳐가는 느낌을 잘 붙잡아두고 그것을 어떤 단어와 연결할 수 있는지를 자주 기억해 둬야겠다는 것을요.
이런 생각을 더 깊게 하게 된 건 지난 한 달간 진행했던 연극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의 프로그램북 작업 덕분이기도 했어요.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는 100년간의 이야기가 '사랑'의 무수히 많은 형태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존재를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아주 다양한 모양이 있을 텐데 오래도록 그 수를 한정지어서 생각했던 것도 같아요. 행복할 때만을 '사랑'이라 여기기도 했는데, 다투거나 헤어지는 순간에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창작진, 배우들과의 대화를 통해 더 느끼기도 했고요. 사랑의 정의를 묻는 것보다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느끼는 구체적인 순간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시간이었어요.
그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사랑'의 순간은 많았어요. 산초가 발등에 얼굴을 기댈 때, 와인을 마시자고 불러줄 때, 오래된 작업을 기억해 줄 때, 응원의 마음으로 후원할 때, 여행지에서 누군가가 떠오를 때, 이름을 기억할 때. 최근에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도 봤는데요. 몰리나가 하나 남은 티백으로 끓인 차를 발렌틴에게 주는 모습도 기억해 두려고요. 적확한 단어도 필요하지만,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구체적인 상황과 표정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쩌다 보니 '사랑'으로 가득한 편지가 되었네요.
오늘도 따뜻한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2주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