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시체관극'에 대한 칼럼 청탁을 받았습니다. '올 게 왔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더군요. 언젠가부터 움직임을 최소화한 관람 방식을 '시체관극'이라 부르는데, 이는 생각보다 오래된 공연예술계의 논쟁입니다. 함께 공연을 관람한 지인이 숨 쉴 때마다 눈총을 주던 관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요. 2009년이었어요. 이후로도 시계 초침 소리나 과한 리액션으로 벌어지는 컴플레인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고, 메모 금지와 (판소리 공연에서) 추임새 금지 소식을 건너 건너 듣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뮤지컬 공연장에서 메모하는 기자와 이를 제지하는 관객 사이의 트러블이 기사화되며 논란이 됐습니다. 격한 감정으로 가득한 기사를 매개로 온갖 비난이 쏟아지더군요. 저 역시도 공연장을 누르는 공기를 꽤 싫어했고, 공연계 지인들과 만나면 이게 문제라며 열변을 토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온라인을 가득 채우는 무분별한 비난에는 동의가 어려웠습니다. '고상한 척하는 유별난 연뮤덕'이라는 잘못된 프레임이 비난을 정당화하고, 매체의 특수성은 깡그리 무시된 채였으니까요. 해당 기사 이후, 서로가 최악의 사례를 들고 와 '누가 더 괴롭겠냐'를 따지기 시작하더군요. 원인을 분석하는 일은 어렵고, 눈에 보이는 존재를 비난하기는 쉽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어요.
칼럼에는 '엄숙주의'라 불리는 공연관람 문화가 왜 생겨났고, 극장과 관객 차원의 자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하지만 힘주어 이야기하려 한 건 자신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어요. 관람문화를 둘러싼 일련의 일들이 현대사회의 여러 혐오문제들과 맞닿아있다고 느껴져서요.
마감을 하고 이틀 후 연극 <와이프>를 보러 갔습니다. 최수영 배우가 캐스팅돼서 더욱 화제를 모았죠. 작품 후반부, 무대에서 의상체인지를 하며 다른 인물이 되는 순간이 어쩐지 부자연스럽고 과하게 느껴졌어요. 해당 장면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인 부분인데요. 지난 시즌들에는 자연스럽게 넘어갔는데 왜 이번에는 몰입이 깨질까 싶었어요. 개막 초기라 그런 건가? 공연이 끝난 후 알게 됐습니다. 해당 장면을 몰래 촬영한 관객이 있었더라구요. 여전히 관람문화는 지난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3가지만 지키면 됩니다. 촬영하지 않기, 휴대폰 끄기, 일행과 대화하지 않기.
<와이프>가 긴 세월을 통과하며 여성과 성소수자의 삶을 다루는 점도 훌륭하지만, 저는 이 작품이 '관객의 이야기'라서 더 좋습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연극 <인형의 집>을 보고 제 안의 억압을 발견하고 해방을 외칩니다. 스스로의 해방 후에는 자기 곁에 있는 소중한 이들도 자유를 찾고 존중받기를 원하죠. 관객은 연극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너그러움이 동료 관객에게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순간을 목격한 얼마 안 되는 사이니까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할 때 우리는 덜 외롭지 않을까요?
사진은 일본 히타시에 있는 한 료칸에서의 밤입니다.
2018년에 갔다 왔는데요. 날이 추워지니 더 생각나네요.
따뜻함이 필요한 나날들입니다.
ps. 아! 칼럼은 <GQ> 2월호에 실립니다.
오며가며 발견하시면 한 번쯤 읽어봐주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