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PIS를 보니 올해 연극은 1,774편이, 뮤지컬은 680편이 서울에서 개막했습니다. (재공연 포함) 어디서 이렇게 많은 작품이 올라오는 것인지 통계를 볼 때마다 놀랍니다. 놓친 작품도 많지만, 저는 올해 또 100편의 공연을 봤고요. 이번에도 '올해의 OOO'을 조촐하게 꼽아보렵니다.
좋은 작품 많았습니다. 서사와 주제가 감동적이고 탄탄하고 신선한 작품, 있었습니다. 음악에 공감한 작품도, 연기가 특출난 작품도, 미장센이 내내 기억 남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결국 무대에서만 가능한 작품이 공연예술에서는 넘버원이라 믿습니다. 투박하고 거친 형태의 인형에 인간의 움직임이 더해져 뱅갈호랑이의 기개가 드러날 때, 앙상블 배우들의 손과 손이 결합해 파이를 옮겨 바다 위의 이동을 보여줄 때, 보트 모양의 구조물 밑에서 뿜어져 나오는 조명이 바다에 비친 달빛을 구현할 때, 아주 황홀했습니다. 가짜임을 그대로 드러내며 무대 위 현실과는 상관없이 관객을 이야기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작품들을 사랑하고, 올해는 <라이프 오브 파이>였습니다.
공연을 보기 전부터 본 후까지 저를 지배한 것은 '그렇네'라는 인지였습니다. 제목을 보고서는 '아, 윷놀이 요새는 진짜 잘 안하지. 그렇네' 했고요. 충청도 사투리 대사들을 들으며 '아, 그동안 무대에서 충청도 사투리가 잘 안 쓰였구나' 했고요. 윷놀이의 긴장과 극적인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슬로우모션보다 더 느린 움직임을 마주할 때는 '진짜 답답한데 이렇게까지 느린 움직임을 기다려본 적이 있나?' 자문했습니다. 낯선 방식이 익숙함에 가려져 있던 것을 다시 꺼내게 했습니다.
올해의 선입견을 깬 공연: <브로드웨이 42번가>, <맘마미아>
오래되고 익숙해서 재미없다. 저는 두 작품을 늘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실제로 공연을 보러 가도 '의의는 알겠으나 재미는 없다'로 마무리되곤 했는데요. 올해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2025년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오루피나 연출은 모든 탭에 쓰임의 이유를 만들어 서사로 이어냈습니다. 탭댄스는 꿈을 향한 간절함, 나를 표현하는 수단, 응원의 정서로 객석에 흘러들었습니다. 2025년 <맘마미아>는 편성된 악기 하나하나의 소리를 예민하게 잡아내는 음향 덕분에 인물들의 감정을 더 진하게 마주했습니다. <브로드웨이 42번가>는 1996년, <맘마미아>는 2004년에 한국에서 처음 공연됐습니다. 그 후로도 꾸준히 공연되고 때로는 캐스팅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두 작품은 고여있지 않고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공연을 넘어 제 개인의 태도도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올해 사랑한 배우들: 조정은, 박지연, 이자람, 전혜진
조정은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보는 내내 아찔했습니다. 그의 프란체스카가 엄청난 결의 페이스트리처럼 세밀했거든요. 그 결이 하나하나 느껴질 때마다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서 괴롭고, 같은 의미로 이런 연기하는 조정은을 더 자주 보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는 조연의 자리에서도 수많은 레이어를 쌓아냈지만요. 그래도 굵직하게 감정의 기승전결을 다 담은 캐릭터로 만나고 싶습니다.
올해의 박지연은 <고스트 베이커리>와 <원스>, <어쩌면 해피엔딩> 무대에 섰습니다. 순희와 걸, 클레어는 모두 밝은 얼굴을 하지만, 그 미소는 두려움과 상처의 가면이기도 합니다. 박지연이 표현한 인물들은 애써서 가면을 쓰는 게 아니라 좋았습니다. 그 가면이 자신의 취약함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보려는 시도처럼 보였어요. 역시 또 개인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프리마파시>의 이자람은 참 든든했습니다. 나라면 쉽게 해내지 못했을 일을 해내는 언니 같아서 멋있었어요. 무엇보다 혼자 가는 것처럼 보여도 옆에서 쭈뼛대는 저에게 다정하게 손을 내밀어주는 느낌이라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10년 만에 <안트로폴리스: 라이오스>로 무대에 선 전혜진은 참 반가웠습니다. 올해 여러 편의 1인극이 있었고, 해당 작품들에서 다양한 여성 배우들이 활약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전혜진의 1인극은 제가 '연기차력쇼'라는 수식어를 처음으로 납득하게 된 작품이었습니다. 변검술마냥 수시로 빠르게 다른 인물로 전환하는 연기 스킬을 넋 놓고 봤고, 관객을 연극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무대장악력에 엄청난 몰입을 경험했습니다.
2025년 12월 31일, 어떠신가요. 저는 주로 잘한 것보다 못했던 것을 기억하고, 과정과 결과의 아쉬움에 자책하고, 다가올 미래를 대체로 바닥에서부터 상상해 불안을 키워갑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길...) 그래도 '올해의 OOO'을 하고 나면 괜히 흐르는 시간은 없다는 걸 느낍니다. 무엇보다 사라지지 않고 버텨냈으니 그것만으로도 잘했다 생각하렵니다.
올 한 해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2026년도 건강하고 계신 곳에서 조금 더 즐거우시길 바랍니다. 내년에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