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감각은 사실 극장에서 자주 받습니다. 리미티드런이 기본인 한국 공연 시장에서 새로운 창작물만큼 자주 보는 게 재공연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프로덕션까지는 평균 3-4년이 걸려 첫 관극과 재 관극 사이 관객인 저의 변화를 인지할 때가 자주 있었어요. 최근엔 빨라진 리턴 주기로 감흥이 덜 해서 좀 아쉽지만요. 어쨌든, 저는 이 시간의 간극이 만들어내는 예술을 좋아하고 그 지점에서 9년 만에 돌아온 연극 <벙커 트릴로지>가 참 좋았습니다. <벙커 트릴로지>는 전시 상황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위치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감정을 다루는 작품입니다. 각각 ‘아가멤논‘, ’맥베스’, ‘모르가나’라는 제목이 붙은 3부작으로, 벙커 같은 좁은 공간에서 100여 명의 관객과 3명의 배우가 함께 전쟁의 한때를 경험합니다. 연극에는 사랑하는 이가 적군이 되었을 때의 괴로움과 적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유 없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비극도 있습니다.
<벙커 트릴로지>가 초연된 2016년, 몇 년째 계속되던 시리아 내전으로 전 세계가 떠들썩했습니다. 그렇게 전쟁이 삶에 가까이 있었음에도, (극 속이라도) 전쟁을 겪는 인물이 50m 앞에 있었음에도 당시의 저는 전쟁을 그저 이야기로만 남겨두었습니다. 물론 마음이 아프고 전쟁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윤리적 허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9년이 흐르고도 전쟁과 폭력은 사라지기는커녕 더 많아졌고, 기술의 발전과 함께 죽음도 쉬워졌습니다. 그 공포가 이제는 ‘나의 것’이라는 감각도 짙어졌습니다. 며칠 전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포로가 된 북한군의 인터뷰를 봤습니다. "북한군은 정말 죽음에 초월했느냐"는 질문에 이런 답이 이어졌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죽고픈 사람이 어디 있고
목숨을 그렇게 쉽게 여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한 건지 마음이 참 무겁습니다. 그래도 ‘윤리적 허영’을 최대한 지우는 게 중요하다 싶습니다. 작품을 극장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 적극적으로 가져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뉴스를 보고, 팔레스타인 후원도 알아보고, 이란의 시위에도 주목하고, 미국의 혐오범죄와 한국의 페미사이드에서 눈 돌리지 않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다짐해 봅니다.
어쩌다 보니 2026년의 첫 번째 편지가 무거워졌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일어난 이러한 변화처럼, 여러분들도 하나의 작품을 통해 그때와 지금의 '나'를 한 번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그저 고여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매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변화가 제게는 저를 긍정하는 피드백 같아서 참 좋았습니다. 그 기쁨을 같이 느끼고 싶어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6년도 모두 몸도 마음도 건강합시다!
또 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