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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발가락 육상천재> 2022.11.03~2022.11.27 소극장 판
<발가락 육상천재>는 지방의 작은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합니다. 호준, 상우, 은수는 방과 후 육상부에서 달리기를 하고, 상우 부모님이 운영하는 초밥집에서 환타를 마시며 오후를 보냅니다. 달리기는 호준이가 가장 잘합니다. 그래서 호준이는 언제나 기세등등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전학 온 정민이가 육상부에 들어오자마자 1등을 합니다. 1등을 빼앗긴 호준이는 그날 이후 온갖 핑계를 대며 훈련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호준이 자주 자리를 비우자, 정민이 아지트의 일원이 됩니다. 무리에서 멀어진 호준이 다시 거짓말을 합니다. 자신의 발가락을 인어가 잡아먹어서 달릴 수 없다고. 아이들은 그 말에 다시 호준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렇게 네 명의 열두 살 소년은 낯선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열두 살을 주인공으로 하기에, 연극에서 표현되는 감정들이 대체로 직접적입니다.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호준은 막무가내고, 그런 그 앞에서 '스포츠맨십'을 운운하는 정민은 꽤 얄밉습니다. 상우와 은수는 1등을 놓친 호준을 쌤통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잘 해내고 싶다는 열망, 1등을 뺏길 수 있다는 불안, 나도 포기하지 않고 해보고 싶다는 조용한 희망이 있습니다. 아직은 진짜 마음을 감추는 게 서툴러 그 마음들이 자꾸 삐져나옵니다.
<발가락 육상천재>를 볼 때마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같다는 생각을 계속합니다. 누구보다 낫거나 못하다는 감정은 비교의 대상이 있다는 얘기고, 그렇다는 건 결국 자신의 가치 판단을 상대에게 의탁한다는 말이니까요. 하지만 누군가와의 비교 없이 자신을 인정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죠. 어릴 때는 그 납작한 마음이 삐죽 내민 입술이나 툴툴거리는 말투로 드러나도 괜찮지만, 어른에게는 허용되지 않아요. 그렇게 쌓인 부러움, 자괴감, 슬픔, 절망의 감정들은 어디로 갈까요.
연극이 중반으로 흐르며 진짜 인어가 등장합니다. 호준의 욕망을 반영한 인어는 아이들과의 대결에서 언제나 승리하고, 호준이처럼 환호합니다. 호준은 그런 인어를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며 과거의 자기를 떠올렸겠죠. 허세 가득한 말들 속에 담긴, 자신이 보려 하지 않았던 감정들을요. 그리고 <발가락 육상천재>는 인어 뱃속에 있던 찌꺼기들을 몽땅 꺼내 놓습니다. 쓰레기처럼도 보이는 감정들을 꺼내놓지 않으면 고여 썩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소시지처럼 줄줄 나오는 소품들이 꽤 알록달록하고 빛이 나서 찌꺼기인 줄 알았던 것들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생각하게 됐어요.
방어기제로 '회피'를 주로 쓰는 저는 언제나 국립극단의 어린이청소년극에 무장해제가 됩니다. 무대를 가득 채우는 감춰지지 않는 솔직함 때문이에요. 누군가가 자기 안의 질투로 몹시 괴롭다면, <발가락 육상천재>를 추천합니다. 시스템 리뉴얼로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8월 2일부터 <발가락 육상천재>를 다시
온라인극장에서 만날 수 있어요.
날이 덥고, 비도 많이 옵니다. 그래서인지 화도 많이 납니다. 시원하고 편안한 순간이 찾아온다면 맘껏 즐기시길. 또 오겠습니다.
ps. 최근에는 쇼뮤지컬에 관한 기사를 썼어요. 그동안은 쇼뮤지컬에 대한 감흥이 '흥겹다'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무방했습니다. 그런데 공연들을 다시 보며 그 흥겨움 안에 담긴 깊이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와 비슷한 마음이 있던 분들이시라면, 한 번쯤 읽어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