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일본에 와있습니다. 여행 자체가 오랜만이어서였는지 아니면 일본을 오랜만에 와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멍청함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던 일본드라마 <핫 스팟>의 영향으로 후지산을 보기로 결정하고 여행 계획을 세웠는데요. 도쿄로 들어와 가와구치코(<핫 스팟>의 배경이 되는, 누군가에게는 후지산이 보이는 로숀 편의점으로 기억되는)에 들렀다 시즈오카에서 나오는 여정으로요. 망원동에서 인천공항, 나리타공항에서 신주쿠역, 신주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가와구치코역까지. 그래도 대중교통편이 잘 되어 있어서 여기와 저기 사이 1시간 반 정도의 여유를 두고 교통편을 구해뒀습니다. 그런데 일본 입국 수속이 너무나 오래 걸린 게 문제였습니다. 이른 입국이 가능한 '비짓재팬'을 해놨으나, 인터넷의 문제로 QR 확인이 제대로 안 됐습니다. 결국 도착 1시간 반이 지나 수속장을 나왔습니다. (저보다 짐이 먼저 나와서 직원분이 지키고 있더라고요;) 예약해 둔 신주쿠행 기차는 이미 떠나 돈을 날렸고, 고속버스 역시 시간이 간당간당해서 50% 수수료를 내고 환불과 재예약을 해야 했습니다. 비로소 후지산이 눈앞에 보이는 숙소에 도착하고서야 안도했지만, 다음 날도 멍청함은 계속됐습니다. 4월 1일부터 15일까지 벚꽃 축제를 한다기에 1시간을 걸어갔더니 꽃이 피지 않아 축제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휑) 자꾸 눈앞에서 30분 배차 간격의 버스를 놓치고, 이동을 위한 기차 요금은 잘못 계산해서 원래보다 3배 가격을 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결국 조급함이더라고요. 성격이 급한 데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당황하는 성격이 낯선 곳에서 폭발한 거죠. 길을 잃어도 수도 없이 여행하던 과거는 이제 떠오르지도 않을 지경입니다. 그저 걸으며 독특한 가게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자꾸만 목적지만을 바라봅니다. 구글지도가 편하고 정확하지만 같은 이유로 양옆을 가린 경주마가 된 듯합니다. 어제는 비가 쏟아지는 중 숙소를 옮겨야 해서 택시를 탔는데, 익히 봐온 입구와는 다른 곳에서 내려줘서 길을 헤매다 캐리어가 계단에 걸려 넘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린 자리에서 뒤로 세 걸음만 걸으면 호텔이더라고요. (허탈) 과정은 없고 결과만 있는 삶의 태도가 몇년 사이 여행에까지 스며들어버렸습니다. 그게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여행 한정 P였던 사람이었는데...
여행을 오기 며칠 전 극단 코너스톤의 <요새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그, 윷놀이>를 봤습니다. 충청도의 어느 한 마을을 배경으로 농민들의 윷놀이를 그린 작품이었어요. 인생의 괴로움과 절박함, 기쁨과 선의가 담긴 아주 페이소스 짙은 코미디. 아주 오랜만이었습니다. 그와 무관하게 저의 마음에 계속 남는 것은 긴 포즈(pause)였어요. 소리도 움직임도 아무것도 없는 정적이 그동안에 본 다른 작품들보다도 훨씬 길어서 몸을 비틀었습니다. 와, 몇몇 장면은 진짜 답답해서 미쳐버리겠더라고요. 실제 멈춘 시간은 채 3분도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 멈춤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의 감정을 건드린 것 외에는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 상황에 화가 나니까 너무 당혹스럽더라고요. 어쩌다 긴 사이를 즐기지 못하게 됐을까. 아마도 빠른 세상 탓도 있겠죠. 손가락만 움직이면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에서 기다림은 배려의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 일본 여행은 사실 불운이 계속됐습니다. 하지만 <요새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그 윷놀이>를 떠올리며, 빈틈과 어긋남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를 찾아보려 애썼어요. 혼자 하는 여행을 2010년에 처음 했으니 이제 15년이거든요. 처음과는 달라진 것들을 인정하고 여행을 대하는 마음을 다시 세팅할 필요가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갑니다. 언젠가의 여행지에서 보낼 편지는 조금은 다른 온도였으면 좋겠습니다.
2주 후에 또 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그래도 후지산은 참 좋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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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주간 본 작품]
정호붕 작ㆍ연출, 김봉순 안무, 신창렬 음악 / 이승희-정지혜-김소진
- 올해의 <적벽>은 3세대입니다. 의상과 음악, 무대 등 여러 요소가 달라졌고 그게 낯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8년의 호흡은 아주 탄탄하고 윤석열 탄핵 인용 전에 봤더니 지금 당장 우리의 이야기 같기도 하더라고요.
양소영 작, 박보윤 작곡, 황희원 연출 / 김다흰-연지현-윤철주-유동훈
- 새로운 노든을 보러 갔습니다. 김다흰 노든에게는 무게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인식되지 못할 뿐이라는 생각이 공연이 다 끝나고 들더라고요. 되려 무언가를 하지 않고 그저 바라봐주고 곁을 잠깐 내어주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힘이 아주 짙었어요. 작품 자체가 여운이 길지만, 다흰 노든은 특히 더 그랬네요.
이철희 재창작ㆍ연출 / 강일, 곽성은, 한철훈, 이강민, 윤슬기, 정홍구
-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진 않지만, 그만의 호흡과 리듬이 일품인 충청도 사투리가 연신 귀에 남습니다. 극단 코너스톤의 작업들이 대부분 그런데 거기서부터 시작한 일상의 페이소스가 참 좋았어요.
[앞으로 2주간 볼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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