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설 연휴의 저는 아주 무기력했습니다. 연희단거리패를 거쳐 간 단원들에게서부터 나온 이윤택 관련 '미투' 때문이었습니다. 공동의 목표를 우선시하고 폐쇄적이며 도제 시스템이 여전한 공연예술계가 조용할 리 없었지만, 연희단거리패에서 벌어진 일들은 귀를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줄도 모르고 연희단거리패와 이윤택의 작업을 좋다고 이야기하던 과거의 제가 너무 싫어서 더 그랬습니다. 물론 이 일이 용기가 돼서 저의 오랜 아픔도 꺼낼 수 있었지만요.
많은 이에게 아픈 이야기를 꺼낸 건, 이윤택의 형기가 종료됐기 때문입니다. 2019년 7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2018년부터 이어진 구속수사 기간이 포함되어 2025년 3월 22일에 끝난다 하더라고요. 여러 분야의 '미투' 이후 여성의 삶에 좀 더 집중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대학로X포럼'의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3월 17일에 열린 '연극계 미투 이후, 우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았다'에서는 연극계 미투가 어떤 과정을 거쳐 폭발했는지, 안전한 제작 환경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 발견되는 위계에 의한 폭력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논지를 흐리는 백래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여러 의견과 말들이 있었지만, 내내 마음에 남는 건 '연루감'이었습니다. 이윤택이라는 거대한 왕국을 만든 이들에는 피해당사자가 아닌 이들도 속해있다는 사실 말이죠. 그의 권위는 그와 작업한 공연예술인 뿐 아니라, 극장과 재단, 기자와 학자, 관객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30년간 함께 만들어낸 것에 가깝습니다. 저는 그 연루감이 스스로를 갉아먹는 '자책'의 방식으로 이어졌는데, '대학로X포럼'에서는 이것을 '연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이 부채감이 나만의 것이 아닌 다른 이들도 공유하는 감각이라는 인식. 그러니 그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동료를 찾아보자는 제언. 비단, 연극계 미투만이 아닌 사회 문제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들여보는 이들에게 너무나 필요한 조언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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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나의 이야기를 더 하고자 합니다. 뉴스레터 독자분께서 연극 <로미오 앤 줄리>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셨어요. <로미오 앤 줄리>는 10대 청소년의 사랑과 임신을 다룹니다. 로미오는 알코중독 엄마, 신생아 딸과 살아요. 가난한 데다 난독증도 있어요. 줄리는 블루칼라 부모의 지원을 받으며 케임브리지 입학을 앞두고 있습니다. 공연을 처음 봤을 때는 상대적으로 부족할 게 없어 보이는 줄리가 왜 로미오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임신중지가 당연해 보이는데 왜 고민하는지, 케임브리지행을 앞두고도 왜 망설이는지 솔직히 이해되지 않았어요. 그러다 부새롬 연출님의 말을 듣고 한동안 정신이 멍했어요. "왜 나는 아이를 낳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것은 행복하다고 생각을 못 할까."
그제야 제가 '사랑'이 아닌 '현실'에만 집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외면했던 줄리의 결핍들도요. 천문학자라는 꿈이 자신의 것임은 맞지만, 그 과정의 지난함과 부담감이 저 작은 어깨를 짓누르진 않았을까. 자신들의 형편을 뛰어넘는 일을 위해 애쓰는 부모님 앞에서 '힘들다'라는 투정을 부릴 수 있었을까. 스스로 벽을 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줄리 주변의 친구들과 섞이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겉으로 괜찮은 척하느라 속은 곪아가는 게 아닐까. 중요한 것은 줄리가 아이를 낳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 선택에 오기까지 줄리가 겪어내야만 했던 여러 어려움을 감각하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그래서인지 공연이 다 끝난 지금 <로미오 앤 줄리>를 떠올리면, 홀로 있었을 줄리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깊게 남아요. 그에게도 일말의 틈이 있었다면, 어쩌면 다른 선택지가 있진 않았을까. 물론 다 가정에 불과하지만요.
* <로미오 앤 줄리> 코멘터리 영상을 진행했었습니다. 작품에 대한 배우와 연출의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참고하셔도 좋아요.
** 상황은 다르지만, 비슷한 소재의 연극 <젤리피쉬>가 공연 중입니다. 다른 방향으로도 고민을 이어갈 수 있어 추천해 드려요.
요즘 날이 더웠다 추웠다 합니다. 그래도 봄입니다. 뭐든 하고 싶다, 느껴지기도 하고요. 불법이 아니라면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사세요. 이 봄이 또 금방 지나가버리니까요. 일교차가 크니 감기 조심하세요.
2주 후에 또 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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