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새롭게 시작하는 작품들의 심사나 평가를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지난 1월과 2월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산실 뮤지컬부문 올해의 신작 일곱 편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시도들에 주목하는 시간들이었는데요. 일곱 편에 대한 칼럼을 쓰게 됐어요. 번외편으로 뉴스레터에도 공개합니다. 일곱 편의 창작뮤지컬이 늦지 않게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같이 읽어주세요. :)
새로운 관객을 기다리며
단연코 1월과 2월은 1년 중 가장 다양한 작품의 공연을 보는 시기다. 새로운 작품의 가능성을 살펴보는 기획 프로그램이 많아서다. 올해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이하 ‘올해의 신작’)과 두산아트센터의 ‘두산아트랩’을 비롯해, 국립극단과 모두예술극장에서도 해외희곡 낭독공연이 이어졌다.
2025년 17회를 맞은 ‘올해의 신작’에는 일곱 편의 창작뮤지컬이 소개됐다. <무명호걸>은 1592년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시공초월을 비롯해 다양한 무공 기술을 포인트로 내세운 작품이었다. <오셀로의 재심>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법정극으로 변주한 버전으로, 가해자 중심 서사에서 밀려났던 피해자 데스데모나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이병헌, 수애 주연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그해 여름>은 시대의 비극을 다룬 멜로드라마로 완성됐다. <넬리블라이>는 100년 전에 활동한 여성 기자의 업적을 중심으로 언론 탄압과 성차별, 산재 등의 동시대적 이슈를 발견해냈다. <라파치니의 정원>은 아버지의 잘못된 사랑으로 ‘독’이 되어버린 딸의 이야기를 다룬다. 독특한 설정과 미장센으로 새로운 판타지 뮤지컬의 가능성을 열었다. ‘치매’라는 소재를 통해 가장 보편적인 가족이야기에 집중한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와 시 쓰는 재미에 빠진 할머니들을 유쾌하게 다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도 다양한 관객을 만났다.
다양성이 돋보이는 소재들
올해의 신작들은 다양한 소재로 눈길을 끌었다. <무명호걸>은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역사의 비극을 ‘무협’이라는 동양적 판타지 세계관으로 풀어냈다. 시대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 과장된 액션, 유쾌한 캐릭터도 돋보였다. 더 많은 관객을 만나기 위해서는 촘촘한 서사 구조와 관계성, 무대적 설득력이 필요하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은 <무명호걸>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시간여행자의 캐릭터가 탄탄히 구축되어 다양한 시대를 아우르게 될 때, <무명호걸>은 시리즈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성인간을 내세운 <라파치니의 정원>은 신에 도전하는 과학자, 비극적 사랑, 낯선 세계관이라는 측면에서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고딕호러 판타지 뮤지컬을 연상케 한다. 다른 공연예술에 비해 환상성이 강한 매체가 뮤지컬임을 고려했을 때, <라파치니의 정원> 역시 마니아 관객의 니즈를 충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와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의 경우 그동안 뮤지컬 시장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 노인’을 다룬다.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가 ‘치매’를 통해 자기 삶을 희생해온 어머니와 가족의 화해를 정석적으로 그려낸다면,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시골 여성이라 외면받았던 과거 대신 지금의 기쁨을 만끽하고 미래를 꿈꾸는 할머니들의 삶을 조명한다. 특히 두 작품은 ‘할머니’라는 보편적인 소재로 공연예술에 낯선 관객들을 초대한다. 누구나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낯설지 않은 서사와 음악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마음껏 감정을 표현해도 된다는 사전 안내 문구로 객석의 경직된 분위기도 풀어낸다. 실제로 두 작품은 10대에서 70대까지 전 연령층의 관객이 극장을 찾아 대중예술로서의 가능성을 증명해냈다.
왜 뮤지컬이어야 하는가
올해 공연된 일곱 편의 작품 중 다섯 편에는 원작이 있다. 원작의 좋은 이야기는 새로운 길의 중심이 되어주고, 무엇보다도 대중의 시선을 붙들기에 매력적이다. 문제는 무엇으로 원작과의 차별성을 가져가느냐에 있다. 다수의 작품이 뮤지컬만의 새로운 서사를 만들었다. <오셀로의 재심>은 ‘재판’이라는 형식을 빌려 오셀로 부부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서사를 덧붙이고, 가정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로 살인사건을 재해석했다. <라파치니의 정원> 역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베아트리체를 통해 그를 남성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이가 아닌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이끌어가는 존재로 그려냈다.
여성 언론인을 내세운 <넬리블라이>의 경우, 여성의 삶 자체에 주목하는 기존의 ‘여성 서사’ 흐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넬리블라이가 여성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찾아간 공장에서 목격한 것은 열악한 노동 현실과 만연한 폭력, 성차별이다. 그는 노동자와 연대하는 방식으로 잠입 취재를 결정하고, 이를 통해 작품은 언론의 역할을 향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언론사와 공장, 정신병원을 오가는 서사의 규모, 깊이 있는 주제, 다채로운 캐릭터와 관계성은 대극장 공연으로의 확장도 상상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2차 창작물이 ‘뮤지컬’이라면, 서사와 음악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느냐를 가장 중요하게 살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돋보인 작품이 <오셀로의 재심>과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이다. 재판 형식을 차용한 <오셀로의 재심>은 여러 명의 증인이 소환된다는 점에서 일정한 패턴을 갖게 된다. 클래식과 재즈를 오가는 음악이 인물의 성격과 상황, 허구와 현실, 과거와 현재를 표현하며 장면을 잇는다. 자칫 지루하거나 밋밋하게 느껴지는 부분을 색다른 자극으로 채워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셈이다.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역시 인물에 대한 유쾌한 접근을 음악에서도 이어간다. 트로트나 발라드 같은 익숙한 장르가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고, 담담하고 해학적인 가사가 경쾌한 리듬을 만나 할머니들의 삶을 하나의 쇼로 완성해나간다. <그해 여름>의 경우, 원작 영화의 서사와 구성을 고스란히 따르며 연인 관객을 타겟팅하는 멜로드라마로 완성됐다. 그러나 이야기에 새로움이 없고 음악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약해 ‘뮤지컬’로서의 아쉬움이 남는다.
여전히 한국뮤지컬시장은 양극화되어 있고, 배우의 티켓파워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진다. 한 해에도 수많은 작품이 쏟아지지만, 신작 창작뮤지컬이 레퍼토리가 되어 꾸준히 사랑받는 경우도 드물다. 시공간의 한계가 분명한 공연예술시장이 꾸준히 움직이려면 새로운 관객이 필요하다. 김준수로 시작된 아이돌 가수들의 뮤지컬 진출이 하나의 문을 열었다면, 이제는 여러 세대와 닿는 다양성이 필요하다. 17회 ‘올해의 신작’은 새로운 소재와 대중적 접근으로 기존 뮤지컬 시장의 세분화와 관객 개발에 도전했다. 성공했을까? 10대부터 60대까지, 청년과 아저씨가 함께 웃고 환호하는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을 보니 가능성은 활짝 열린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