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새해의 시작은 어떠셨나요?
저는 2024년 마지막 날 저녁, 친구와 함께 뮤지컬 <긴긴밤>을 보고 정종과 칵테일을 마신 뒤 2025년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습니다. 1월 1일은 속을 달래느라 애를 썼으니, 제대로 된 2025년의 시작은 1월 2일이라고 볼 수 있겠어요. 🤣
영화 <하얼빈>을 봤고, 저녁엔 한강진역 탄핵찬성 집회에 나갔습니다. 저에겐 '블루스퀘어'로만 기억되는 한강진역을 공연이 아닌 집회차 찾는다는 게, 객석과 길바닥 사이가 채 200m도 안 된다는 사실이 낯설게만 느껴졌어요. 1시간가량의 공식행사를 지켜보고, 대통령 관저까지 행진하며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생각보다 춥지 않은 날씨, 정대만과 페미니스트 깃발 아래를 걷는 일, 행진하는 무리를 향한 환대, 완벽한 딕션과 깔끔한 음향으로 뿜어져 나오는 구호와 외침들. 그런데 행진을 마치고 다시 한강진역으로 돌아갔을 때, 탄핵반대 집회자들을 마주하게 됐어요. 역과 지하철 안을 은근히 채우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이날은 좀 우스웠습니다. 그러다 그 긴장이 공포가 된 건 이틀 뒤 1월 4일 집회에서였어요.
저녁 공연이 있어서 갈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에 한강진으로 다시 갔습니다. 공연 시간상 2시간 정도 머물다 나와야 했는데, 오후 5시의 한강진역은 그야말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팽팽하게 견제하고 있었고, 탄핵반대쪽 사람들은 빨갱이와 중국, 북한 등을 언급하며 심한 욕을 하거나 시비를 걸며 사람들을 맹렬하게 째려봤습니다.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 직전, 제 옆에 계시던 분이 뛰어나가서 두 분 사이를 막아냈습니다.
그들의 구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어요. 사람이 너무 많아 결국은 통제가 되지 않았을 때, 인파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초등학생 아이를 보았습니다. 제 공간을 조금 열어 그 가족의 공간을 확보해 주었어요. 가까이 온 아이 엄마의 가방을 보니 태극기와 성조기가 있었습니다. 한강진역 지하철 무정차 안내에 다시 이태원역을 향해 걸을 때는 'STOP THE STEAL' 피켓을 들고 걷는 젊은 남녀를 참 많이도 만났습니다. 같은 길에서 지하철의 같은 칸에서 마주한 아주 평범한 얼굴들이었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일상을 살아가겠죠. 어쩌면 내가 어딘가에서 만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자, 혼란스럽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2017년에 장우재 작, 김광보 연출의 연극 <옥상밭 고추는 왜>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 2025년 한강진에 있었습니다. 이 연극은 재개발 예정지역의 빌라에 복닥복닥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어요. 옥상에 심은 고추를 타인이 몽땅 따가자, 고추를 심은 주민이 말다툼 끝에 쓰러집니다. 주민들은 이 사건을 두고 저마다의 말을 보태고,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입장이 쏟아집니다. 자신의 억울함만을 내세우는 이와 거칠게 사과를 강요하는 이가 있고, 문제 일으키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이도 있습니다. 독거노인과 비정규직, 취업에 실패한 청년 등이 마주하는 현실의 괴로움은 이들의 입장에 꽤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비슷한 사람들이겠거니 생각했던 이들이 아주 평범한 얼굴로 완전히 다른 태도를 취할 때의 당혹스러움. 한강진역 한복판에서 아주 오래전 보았던 연극이 떠오른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현실은 언제나 연극보다 더 가혹합니다. 실질적인 위협과 폭력이 난무합니다. 저는 겁이 많고 회피 성향이 짙습니다. 그래서 운신의 폭이 좁지만, 같은 이유로 자주 안전합니다.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만큼은 지우지 않으려 합니다. 아이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을 테니까요. 2025년에는 작은 것들을 잘 기억하고, 부정적인 것에 잠식되지 않기를 다짐해 봅니다.
한남대로를 몽땅 차지하는 기분도 좋았지만, 그보다는 역시 블루스퀘어 객석에서 공연을 보고 싶습니다. <레미제라블>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도 길바닥이 아닌 안전한 극장에서 듣고 싶어요. (아래 영상은 2012년 초연 버전입니다)
얼른 좀 잡아갔으면 좋겠네요.
또 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