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1일입니다. 뒤늦은 편지를 결국 마지막 날에 보내게 되네요.
여러분의 2024년은 어떠셨나요. 12월의 여러 일로 한 해가 잘 기억나질 않습니다. 열두 달을 되돌아보자 마음먹다가도 금세 그 에너지가 사그라들곤 합니다. 같은 마음인 분들이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계엄령과 탄핵소추, 여객기 참사까지,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화나고 슬픈 일이 많았습니다. 저는 12월 한 달간 그릇을 세 개나 깨 먹었습니다.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 연달아 벌어지는 걸 보고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전히 쉽지 않은 날들입니다. 그래도 과거가, 함께한 이들이 있음에 오늘과 내일이 있다는 마음으로 한해를 돌아보려 합니다.
저는 올해 총 100편의 연극과 뮤지컬을 보았습니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엔톡 라이브 플러스 상영으로 만난 <디어 잉글랜드>였어요. 영국의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끄는 감독과 코치진, 선수들을 통해 서로 다른 개인이 어떻게 한 팀이 되어가는지를 구체적으로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공연을 본 당시에는 여러 매력에 사로잡혔는데, 지금은 딱 한 장면이 기억에 남네요. 연습을 통해 페널티킥에 대한 부담감을 줄여가는 장면인데요. 선수들은 공을 차기 전, 자신의 이름과 함께 숫자를 외칩니다. 천 번대가 넘어가는 이 숫자는 그동안 누적된 축구 국가대표의 수입니다. '나'라는 개인은, '국가대표'라는 역사 속 일부라는 감각을 아주 짙게 느낀 순간이었어요. 제게는 이 장면이 마치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지지 말라는, 개인에만 몰두한 선택이 세상과의 단절임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생각하다 보니 12월의 곳곳도 함께 떠오릅니다. <디어 잉글랜드>는 2025년 3월 영국에서 재공연되는데요. 하반기 국립극장 엔톡 라이브 플러스에서도 재상영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너무 기다리고 있음. ㅠㅠㅠㅠ
올해의 연출가로는 윤혜숙 연출가를 꼽고 싶어요. 그의 연극들은 대체로 복작복작합니다. 등장인물이 많을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인물들의 내면이 무수히 많은 감정과 모순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머금은 것들을 쫓아가고 상상하며 나와 닿는 경험을 참 많이 했어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작품에 유머가 더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저는 윤혜숙 연출이 올해 <더 라스트 리턴>과 <은의 혀>에서 보여준 블랙코미디를 기억하려 합니다. 매진 공연의 취소 표를 차지하기 위한 <더 라스트 리턴>의 고군분투는 처절하지만 동시에 아주 우스꽝스러웠어요. 아이를 잃은 엄마의 슬픔도 <은의 혀>의 여러 인물 덕분에 조금은 가볍게 햇볕에 말라갈 수 있었어요. 올 한 해 윤혜숙 연출가의 연극들을 보며 짠하고 어이없고 슬프고 즐거운 감정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소하고 가벼운 터치 안에 담긴 아주 깊고 진지한 마음의 힘을 저도 기르고 싶어졌어요.
다시 만나서 반갑고 여전히 좋은 작품은 <고등어>였습니다. 2016년에 보고 8년 만이었는데요. 세상과 제 안의 복잡한 마음도 알기 어려운 중2 소녀들의 '파하-'하고 숨 쉬어지는 찰나를 포착한 작품입니다. 의성어와 의태어로 가득한 희곡의 문장들은 말 그대로 파닥이고, 그 생명력이 올해도 빛나고 있었어요. 여전히 그 언어들에 반응하는 40대라는 사실이 어쩐지 뿌듯하기도 했고요. ㅎㅎ
올해 제가 가장 자주 생각한 배우는 김환희였어요. <넥스트 투 노멀>과 <렌트>, <킹키부츠>와 <하데스타운>까지, 그는 대체로 초연보다는 완성된 공연에 참여해 왔습니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캐릭터에게 자신만의 결을 만들어낸다는 건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죠. 그걸 해낸 배우가 김환희였습니다. 김환희가 <넥스트 투 노멀>에서 보여준 수없이 많은 자책의 순간들은 한 인간의 추락과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모두 느껴져서 공연을 보는 내내 참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러더니 4개월 후 정반대 인물인 <킹키부츠>의 로렌으로 돌아오더라고요? ㅎㅎ '단순하다'라는 수식어 뒤에 숨겨진, 모든 존재를 동등하게 바라보는 태도가 김환희의 로렌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태도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면 모두를 수용하는 것. 10년이라는 <킹키부츠>와 저의 시간이 흐른 덕이기도 했겠지만, 작품의 주제를 바로 전달받은 로렌은 김환희가 유일했어요. 2024년 <넥스트 투 노멀>과 <킹키부츠>를 김환희라는 배우로 이어 보면서 어쩐지 내내 자책하던 아이가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받아들이며 이렇게 자랐다고도 상상하게 됐어요. 아마도 그런 삶을 제가 꿈꾸고 있어서 이런 과한 상상을 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공간을 상상하게 하는 음악을 좋아하는데요. 뮤지컬 <긴긴밤>의 넘버들이 그랬습니다. 소설 속 문장과 삽화에 담긴 감정과 햇빛, 바람과 죽음의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터지는 멜로디에, 섬세한 가사에 담겨있었어요. 너무 좋아하는 소설이라 혹시라도 실망하면 어쩌지, 라는 마음을 단번에 지워버렸던 여름의 연습실을 종종 기억합니다.
쓰다 보니 편지가 아주 길어졌어요.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지만, 언젠가 또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마감을 잘하자...) 이만 줄이겠습니다.
올 한 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슬픈 일도 화나는 일에도 같이 슬퍼하고 화낼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즐거운 일들도 많았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해요. 예스24의 <긴긴밤>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2024년의 마지막을 보내셔도 좋겠습니다. 들쭉날쭉한 뉴스레터도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2025년에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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