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한 달간 꽤 많은 일을 했습니다. 평소의 2.5배를 훌쩍 넘은 업무량과 급격하게 더워진 날씨에 영 맥을 못 추스르는 나날들이었습니다. 맡은 일을 다 털고 나니 7월이 지났더라고요. 심신을 일으키느라 편지가 늦었습니다. 결국 8월 편지는 오늘의 편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겠네요... 죄송하고 또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최근 『라이프 이즈 하드』라는 아주 노골적인 제목의 책을 읽었습니다. 인생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제목만큼 냉정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요. 목차도 '질병-외로움-상실의 슬픔-실패-불공정-부조리-희망'입니다. 유한한 생을 살아가는 인간 모두가 이러한 시련을 피할 수 없으니 현실을 직시하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책은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을 소개하는 것이 아닌, 이 고통이 어디서 왜 오는지에 집중하고 있어요. 작가인 키어런 세티야 MIT 철학 교수는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가 불공정의 범위를 넓히고 있으며, 인간을 사유재를 축적하는 사회적 원자로 묘사하는 소유적 개인주의가 지난 20년간 서구 사회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고통스럽다'라는 감정에만 매몰되어 답답하기만 했던 저에게 명확한 이유가 담긴 이 책은 그야말로 정신 번쩍 들게하는 냉수마찰이었어요.
그중에서도 유심히 본 건 '외로움' 챕터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관은 1인용'이라는 마음으로 삽니다. 누군가가 곁에 있건 없건 인간에게 고독은 디폴트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실천은 잘 못해도) 스스로를 잘 돌봐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그런 이유로 '외롭지 않다'고도 이야기하곤 했어요. 그런데 책에서 말했습니다. "외로움이라는 사회적 단절의 고통을 혼자라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아... 한 대 맞은 것 같더라고요.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외로운 인물들이 나오는 공연을 많이 봤습니다. 연극 <아이들>에는 원자력 발전소의 붕괴로 삶의 터전을 잃고 흩어져 살아가는 60대 과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안전'을 핑계 삼아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고립을 선택한 이와 늦더라도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용기 낸 사람의 이야기였어요. 뮤지컬 <홍련>은 "내 얘기 좀 들어줘"라고 울부짖는, 철저히 외면당한 피해자의 목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 속 벨라의 현실과 문장들은 종종 거울처럼 보였습니다.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없이 그저 소설 속에만 파묻힌 삶. 보호자의 행방을 묻는 항암치료실 의료진에게 "집까지 걸어갈 거"라고 단호하고 과하게 뱉는 문장. 낯선 남자와 무의미한 섹스를 하고 집에 돌아와 코트도 벗지 않고 최소한의 불만 켜둔 채 덩그러니 앉아 있는 뒷모습.
외로움의 실체가 제 안에 차곡차곡 쌓이더니 결국, 연극 <은의 혀>에서 터져버렸습니다. 여덟 살짜리 아이를 사고로 잃은 은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이와 함께 있던 장례식장 조문객실에 조문을 옵니다. 은수를 자주 목격한 상주도우미 정은은 그에게 술 대신 밥을 권하고, 비밀인 듯 거짓말인 듯한 알쏭달쏭한 말을 늘어놓으며 은수 곁을 맴돕니다. 그리고 혼자인 정은이 일하다 얻은 큰 병으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할 때, 은수가 돕습니다. "폐 끼친다 폐가 된다 혼자 생각하지 말고 그냥 폐 끼치자"고 말하는 은수와 아이의 죽음을 침묵하는 은수에게 "나 가면 누구한테 말할래"라는 정은의 마음에 한참을 울었습니다. 공연을 보는 내내 생각했어요.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에 토 달지 않고 그 세계에 기꺼이 함께 해주는 것이, 밍밍한 죽을 먹어야 하는 이에게 참기름을 챙겨주는 것이,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기억해 주는 것이 외로움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이라고요.
오지랖의 미묘한 선을 외줄타기 인간문화재처럼 사뿐히 걷는 이지현 배우와 앙 다문 입술에 감정을 꾹꾹 눌러놓다가 기어이 터져버리는 강혜련 배우의 연기 때문에 더 많이 웃고 울었습니다. 시침 뚝 떼고 슬픔을 위트로 받아치는 연출도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물론, 그래서 더 슬프지만요...😭 저는 올해의 연극으로 <은의 혀>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아마도 저에게 8월은 외로움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9월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조금은 선선해지는 날씨와 함께 여백 있고 다정한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ps. 아래 첨부된 동영상은 <은의 혀>의 주제곡과도 같은 더클래식의 '여우야'입니다. 오랜만에 들으니 참 좋네요. 작품을 떠올리면 슬프고...😢
"이 밤 너에게 주고픈 노래 너만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들어줄 사람도 없이 빗속으로 oh-oh 흩어지네 너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닿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 긴 밤을 꼬박 새우고 빗속으로 어느새 새벽이 오고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