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여러 버전의 <맥베스>를 보았는데요. 딱 '이거다!' 싶은 작품이 별로 없었습니다. 왕좌라는 욕망이, 마녀의 예언이라는 환상이, 욕망을 위해 살인한다는 방식이 다 남의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물론, 왕좌와 마녀와 살인의 상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제 욕망을 투영하고 상상해서 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맥베스>는 그 어떤 고전보다도 자주 소환됩니다. 올해만 해도 <맥베스>를 소재로 한 네 작품이 소개됐어요. 농인 배우가 연기한 김미란 연출가 버전의 <맥베스>, 꾸준히 고전으로 무대에 오르는 배우 황정민의 <맥베스>, 남성 2인극으로 각색한 찬컴퍼니의 <맥베스처럼...>, 마지막으로 세 명의 여성 배우가 만든 <맥베스>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한 <맥베스>는 지금까지 제가 봐온 <맥베스> 중 가장 인상적인 접근을 보여줬습니다. 이 작품은 '<맥베스>를 준비하는 여성 배우 셋'이라는 설정으로 시작됩니다. <맥베스>가 여성 배우에게 부여하는 배역은 레이디 맥베스와 마녀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없네요;;) <맥베스>의 세 배우 백소정, 정은재, 한혜진도 세 마녀를 연기해요. 공연은 공평하게 진행되는 듯하다, 맥베스가 등장하는 순간 균열이 생깁니다. 누가 맥베스를 할 거냐는 거죠. 다양한 젠더가 고려되지 않던 시절, 생물학적 여성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았던 캐릭터. 세 배우에게는 '맥베스'가 왕좌가 됩니다. 맥베스를 부추기며 실질적 리더에 가까운 '레이디 맥베스' 역시 마찬가지고요.
배우들이 '배우'를 연기하며 '배역'을 욕망한다는 지점이 심리적으로 좀 더 가깝게 다가왔습니다. '협업'이라는 지점에서 어디에나 있는 '노동'을 생각하게도 되었고요. 특히 입체적이고 비중이 높은 인물을 연기하고 싶으면서도 그 마음을 숨기려 애쓰는 모습들이 돋보였어요. 웃기면서도 마음 한쪽이 무거운. 자잘해 보이지만 상처의 깊이만큼은 절대로 얕지 않을 좌절들을 느낄 수 있어서요. 나의 욕망이 나의 가치관을 비켜날 때의 심리적 괴로움은 또 어떨까요. 더 잘나가는 동료에게서 느끼는 질투, '장유유서'를 들이밀어서라도 배역을 따내고 싶은 마음, 나의 노력이 쓰임 받지 못할 때의 억울함이 무대에 넘실댑니다.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이라는 대사가 드디어 깊게 들어왔습니다. 연출과의 친분, 여성서사라는 명분, 학벌, 인지도, 작업 방식 등 온갖 종류의 조롱과 인신공격이 쏟아지는 걸 바라보고 있자니, 그 역시 살인이구나 싶었고요. 실제 배우들의 현재 상황과 커리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사들이라 실컷 웃다가도 아주 내밀한 고민을 듣게 된 것 같아 여운이 꽤 길었습니다.
습기에 약한 인간이라 여름이면 참 힘이 들어요. 뭘 봐도 부정적인 기억만 남겨가는데 오랜만에 그 괴로움을 잊게 하는 작품이었어요. 공간이 협소하고 좌석도 많지 않지만 그래서 더 깊게 마음을 나누게 돼요. 한동안 저에게 <맥베스>는 '신촌극장x백소정, 임성현, 정은재, 한혜진'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을까요? 익숙함 안에서 새로움 찾아내기. 하반기는 이런 다짐으로 살아가 보렵니다.
덥고 습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