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6월, 열한 번째 편지입니다. 오늘은 꾸준함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해요. 저는 오래도록 제가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약속을 잘 지키려 노력했고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왔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고 매일 일이 주어지는 직장을 나오고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고요. 그래도 '일' 관련 패턴은 곧잘 잡혔지만, 이런 사실은 일 외의 삶은 엉망이라는 방증이기도 해서 마냥 좋지도 않았습니다. 운동도 하다 말고, 한 끼를 만들어 먹으면 바로 다음 끼니는 인스턴트로 때우고, 스스로 만든 매체였던 <여덟갈피>도 어느새 멈추고. 돌아보니 꾸준한 것은 3~4개의 모바일 게임뿐이네요.
공교롭게도 지난 2주간 오래도록 멈췄다가 다시 관객을 만난 작품을 봤습니다. 음악극 <섬:1933~2019>와 연극 <인정투쟁; 예술가 편>은 5년 만이었습니다. 연극 <고등어>는 6년이 지났네요. 세 작품 모두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어서 반가웠어요. 긴 시간 사이 달라진 것도, 변하지 않는 것도 보여서 더욱 즐겁기도 했습니다. <인정투쟁; 예술가 편>은 장애를 가진 예술가 당사자들이 예술인으로서의 자신을 증명하는 작품입니다. 2019년 초연 당시에는 다양한 장애를 가진 배우들의 서로 다른 속도가 어려웠습니다. 낯선 띄어읽기, 대사와 대사 사이의 긴 침묵, 일정하지 않은 성량과 느린 걸음걸이 모두가요. 무엇을, 이들을 '어떻게' 봐야 할 지 우왕좌왕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상당히 빠르고 일정한 속도에 길들여져있었다'라는 감각만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5년이 지나고 개인들의 특징을 더 눈에 담게 됐어요. 수동휠체어를 밀며 빠르게 치고 나가는 팔근육을, 자기만의 화술 속도에 담긴 유머를, 새침하기도 자조적이기도 한 목소리들을. 관객인 '나'의 성장을 위해서도 5년은 필요한 시간이었구나 싶었어요.
<섬:1933~2019>는 1930년대, 1960년대, 2010년대를 관통해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 그들을 돌본 자원봉사자, 발달장애아동을 키우는 가족의 이야기를 합니다. 작품 속 시대가 흐르며 모욕적인 언행은 많이 사라졌지만, 차별은 더욱 교묘해졌어요. 올해는 '시선'에 담긴 마음을 더 생각하게 됐습니다. 힘겨워하는 이들을 응원하는 따스함이 작품의 중심에 있지만, 분함과 불편함, 억울함과 이상함, 호기심과 연민도 시선의 일부였습니다. '싫다'는 감정이 담긴 눈빛은 "싫어"라는 말보다 더 잔인했어요. 분명히 존재하지만 잘 살피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에서요. 어떻게, 잘, 볼 것인가. 요즘의 화두입니다.
하나씩 따져보면 꾸준하진 못했어도, 지난 5년은 일하는 사람이 아닌 '나'를 보려고 부단히 애쓴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몰랐던 세계를 다양한 공연에서 마주하기도 했습니다. 일로 이어지며 더 깊은 공부가 되기도 했고요. 계절을 느끼고 새로운 가능성도 찾아봤습니다. 잘 먹고 잘 자는 일에도 신경 쓰고, 오래도록 묵혀두었던 상처를 꺼내 이야기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또 다른 문을 열어주기도 했고요. 5년 만에 만난 두 작품으로 알게 모르게 축적된 저의 시간을 깨닫게 되었어요. 작품이 숙성되는 동안, 저 역시도 조금은 앞으로 나아간 듯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변화에 맞춰 글을 썼지만, 두 작품 모두 참 좋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고심하게 되고, 반성하게 됩니다. 잠깐 멈춰서 지금 있는 자리를 바라보게 하는 그런 작품이 참 좋습니다.
그럼 2주 후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