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대한극장 폐관 소식을 들었습니다. 시대의 변화라는 이유로 사그라드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있지만, 그곳이 <슬립 노 모어>의 공간이 된다니 아쉬움의 자리에 기대가 자라나기도 했습니다. 2015년에 종아리 근육이 터져라 뉴욕의 호텔을 뛰어다니며 <슬립 노 모어>를 본 기억도 같이 떠올랐어요. (오래 전 원고를 다시 찾아봤는데 작품에 대한 사랑고백을 구구절절 해놨네요. ㅎㅎㅎ)
공교롭게도 가장 최근에 본 작품이 혜화동1번지 8기동인 '창작집단 여기에있다'의 <일상에서 살아남기>였습니다. 스무 명 안팎의 관객이 혜화동 일대를 걷는 이동형 공연이었습니다. 금요일 3시, 주말과 어린이날을 앞둔 때라서인지 혜화동에는 유난히 사람이 많았어요.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효 콘서트'에는 송가인이 '아리랑'을 부르고 있었고, 단체로 대학로를 찾은 고등학생들도 많았어요. 날씨가 좋아 슬렁슬렁 걷는 사람들 사이로 홀로 가면을 쓰고 혜화역 4번출구에서 2번출구로 이동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어요. 주목받기를 싫어하는 저는 땅만 보고 평소보다 더 빠르게 걸으며 가면을 쓴 다른 관객들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어요. 모든 관객이 모여 함께 이동하면서는 괜찮아졌지만, 5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느꼈던 '주눅'의 경험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마도 '나만 다르다'라는 이유가 주눅의 정체였을 거예요.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라고 생각하고 말해왔지만, 실제로는 '나만 다른' 경험일 때 '틀렸다'라는 감각이 먼저더라고요. 위치를 바꾸지 않으면 전혀 몰랐을 것이라는 사실에 조금 섬뜩해졌습니다.
최근 몇년간 저를 흥분시키는 공연들은 관객참여형 공연입니다. <슬립 노 모어>나 기내를 배경으로 하는 <플라이트> 같이 개인적인 감정에 집중하는 작품도 있지만, 사회적 이슈를 다룬 작품이 더 깊이 남았어요. 0set 프로젝트의 <관람모드-만나는 방식>은 극장과 일상의 배리어프리를 이야기하고, <저 너머로의 발걸음>은 사당역에서 생명안전공원 부지까지 이동하며 세월호 참사를 기억했습니다. 소방관의 트라우마를 다룬 <버닝필드>도 봤고, <일상에서 살아남기>도 참사와 안전을 주제로 합니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이라는 게 싫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세월호 참사나 강남역 살인사건, 이태원 참사 등의 비극을 뉴스로만 접할 뿐, 추모를 위한 행동을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모두들 세월호 참사 때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한다는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이 안나요. 그래서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들만 있습니다. 그렇다고 추모현장을 찾지도 않으니 자책도 같이 옵니다. 거리에서 불특정 다수의 시선을 느끼며 왜 이런 공연을 계속 찾아보는지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어요. 용기는 없는데 부채감은 있어서 뭔가를 하고 싶구나, (온전하진 않지만) 직접 걷고 만지고 나를 던짐으로써 뭔가를 알고 싶구나. 이야기 뒤로 숨는다는 게 종종 '위선'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위선이어도 아무 것도 안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려 합니다. 다음주에는 무리를 해서라도 광주를 다녀올까 해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이머시브 시어터로 만든 <나는 광주에 없었다>가 재공연을 합니다. 다녀와서 소식 전할게요.
'나와의 마감을 잘 지키자'라는 마음으로 뉴스레터를 시작했는데, 마감을 종종 어기고 있습니다... 다시 정신차리고 2주 후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